디자인노트 009 - 건축보다 먼저 존재했던 지형
자연이 만든선 지형
오래된 디자인 노트를 펼치다 보면 특정 형태를 연구한 스케치보다 더 흥미로운 흔적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번 스케치는 건물의 형태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기보다 자연지형과 건축의 관계를 고민한 생각의 흔적에 가깝다.
노트 곳곳에는 이런 단어들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경사지.
레벨차.
테라스.
사람의 동선.
지형순응.
이런 단어들은 건축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 보았을 주제들이다. 지형의 조건을 어떻게 읽어내고, 그것을 건축으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건축가는 늘 그 사이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당시의 나는 건축물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보다 건축이 어떤 방식으로 땅과 대화하고 관계를 맺으며 그 위에 존재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다.
건축은 종종 평평한 대지를 전제로 시작된다. 하지만 실제의 땅은 결코 평평하지 않다.
높고 낮음이 존재하고, 경사가 있으며, 물길이 흐르고, 사람이 자연스럽게 선택하는 동선이 있다. 건축가는 때때로 이러한 조건들을 제거하려고 한다. 땅을 깎고, 메우고, 정리한 뒤 그 위에 건물을 올린다.
하지만 자연은 늘 원래의 형상을 기억한다.
이번 스케치는 반대의 생각으로 접근한다.
건축이 지형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지형이 건축의 형태를 결정할 수는 없을까.
스케치 속 건물들은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존재하지 않는다. 경사를 따라 나뉘고, 레벨차를 이용해 연결되며, 곳곳에 테라스와 열린 공간을 만든다. 마치 건물이 땅 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형의 일부가 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안에는 보행의 즐거움이 있다.
사람이 걷고, 머무르고, 풍경과 마주하는 과정이 건축의 중심에 놓여 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건축보다 동선이 먼저 스케치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어디로 걷고,
어디에서 머무르며,
어떤 풍경을 바라보게 될 것인가.
그 흐름을 따라 건축이 배치된다.
그래서 건물의 형태보다 사람의 경험이 먼저 만들어진다

두 번째 스케치에는 이런 메모가 남아 있다.
"경사지 자연에 순응하고 단정한 건축이 단아하게 자리 잡다."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보니 꽤 인상적인 문장이다.
좋은 건축은 반드시 강한 존재감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자연보다 앞에 서기보다 한 발 뒤로 물러나 주변 환경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건축이 더 좋은 건축일 수도 있다.
건축은 결국 자연이라는 캔버스 위에 그려지는 인공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자연을 이기려는 건축보다 자연과 공존하려는 건축이 더 오래 기억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노트의 마지막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상상은 늘 미완성이다. 생각의 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건축 디자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건축은 정답을 찾는 과정이라기보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 가깝다.
이번 스케치는 하나의 완성된 건축을 그린 것이 아니다.
자연 속에서 건축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오래전의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지형 위에 선을 그리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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