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03] - 건축은 대지와의 한판 승부다

좋은 건축은 특별한 건축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건축인지도 모른다. 대지와 사람, 기능과 도시의 흐름이 충돌하지 않고 하나의 풍경으로 읽히는 것. 아마도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좋은 건축물의 모습일 것이다."새로운 건물이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건축은 대지와의 한판 승부다.

2010년 대학 출강 당시 디자인 노트에 적어 두었던 문장이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다소 거칠게 들리기도 하지만, 당시의 생각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건축가는 대지와 마주한다.

대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수많은 조건들을 품고 있다. 방향과 경사, 주변 환경과 도시의 흐름, 사람들의 움직임과 시선까지. 건축은 그 조건들을 하나씩 읽어내는 작업에서 시작된다.

마치 검술의 고수가 자연스럽게 서 있어도 빈틈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좋은 건축도 그렇다.

억지로 힘을 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존재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건물이 서고 나면 건축가는 또 다른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사람들의 이동과 동선.

서 있는 차량 앞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습관적인 움직임.

그리고 건물이 수행해야 하는 본래의 기능.

이 모든 것들이 충족되어야 비로소 건축은 완성된다.


아침 출근길, 나는 가끔 당혹스러운 장면을 마주한다.

주차장에 들어가기 위해 잠시 대기하는 시간이 있다.

그 사이 회사 건물 앞 주차 대기 공간을 가로질러 자신의 목적지로 향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게 된다. 바쁜 아침이다 보니 사람들은 가장 짧고 편한 길을 선택한다.

어떻게 보면 주차장은 개인 소유의 부속시설이다.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거나 이용하는 공간은 아니다.

하지만 회사 건물은 도로의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고, 지하주차장으로 진입하기 위한 기계식 주차 장치가 외부에 설치되어 있다. 주차를 위한 대기 공간이 비어 있고 사람들은 그 공간을 자연스럽게 가로지른다.

모퉁이는 도시에서 가장 많은 시선과 움직임이 교차하는 장소 중 하나다.

그래서 대부분의 건물은 그 자리를 비워두지 않는다.

하지만 이 건물은 다른 선택을 했다.

주차를 위한 공간을 계획했고, 그 결과 건물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그 공간과 마주하게 되었다.

건물의 형태나 건축가의 생각이 먼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주차장이 먼저 보인다.

물론 개방감은 좋다.

그러나 실제 사람들이 이용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또 다른 질문이 생긴다.

대안 없는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어쩌면 이것은 건축계획이 가진 딜레마인지도 모른다.

기능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다.

그러나 건축은 그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건축은 결국 사람들의 경험 속에서 평가된다.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

무심코 마주하는 풍경.

건물을 처음 만나는 순간의 인상.

이러한 것들은 도면 위에서 수치로 표현되지 않지만 실제 건축에서는 매우 중요한 요소들이다.

대지가 가진 특성을 한 방향으로만 해석하고 분석했다면, 그 작은 판단의 오류는 건물이 존재하는 내내 불편함으로 남게 된다.

우리는 종종 생각의 한계치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 정도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고민을 멈춘다.

그 순간 기능과 건축의 차이가 만들어진다.


대지의 특수성.

사람들의 행동양식.

건물의 기능.

도시와의 관계.

건축가는 이 모든 조건들을 동시에 풀어내야 한다.

그래서 건축은 늘 어렵다.

그리고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다.

오늘도 우리는 대지와의 한판 승부를 한다.

하지만 그 승부는 대지를 이기는 일이 아니다.

대지가 가진 조건과 가능성을 끝까지 이해하려는 과정에 가깝다.

새로운 건물이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도록.

정리되지 않은 글 <handwrited by PNH>

건축가의 메모

십수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보니, 이 글은 건축의 형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건축이 놓이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좋은 건축은 특별한 건축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건축인지도 모른다.

대지와 사람, 기능과 도시의 흐름이 충돌하지 않고 하나의 풍경으로 읽히는 것.

아마도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좋은 건축물의 모습일 것이다.

"새로운 건물이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이전 글  ESSAY 02 푸른 도시 선언 (Net Green)

다음 글  ESSAY 04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