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노트 011 - 사람의 행동은 설계될 수 있는가?

오래된 디자인 노트를 다시 들여다보다 보면 형태를 고민한 흔적도 있고, 공간을 고민한 흔적도 있다. 어떤 날은 재료를, 어떤 날은 지형을 고민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끔은 건축과 사람, 자연이 어떻게 소통하고 융화될 수 있는지를 더 고민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건축보다 사람이 더 궁금해질 때가 있다.
이번 스케치가 바로 그런 경우인 듯하다.
당시의 노트에는 Pedestrian, Community, Flow, Dwelling 이라는 단어들이 적혀 있다. 언뜻 보면 공동주택의 배치나 외부공간을 구상한 스케치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이 스케치에서 고민했던 것은 건축물이 아니라 사람의 행동이었다.
건축가는 주거를 계획한다.
주거는 외부공간으로 스며들고, 녹지는 방향성을 만들며, 커뮤니티 시설은 사람들을 연결하기 위해 적절한 위치에 배치된다. 각각의 요소는 저마다의 역할과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었다.
건축가가 상상한 대로 보행자는 움직여 줄까?
공동주택을 설계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움직임을 예상하게 된다.
이 길을 걸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 공간에 머물 것이라 기대하며,
이곳에서 이웃을 만나기를 상상한다.
그래서 길을 만들고,
녹지를 배치하고,
커뮤니티 시설을 계획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건축가의 생각보다 훨씬 자유롭다.
의도한 길 대신 다른 길을 선택하기도 하고,
머물기를 기대한 공간을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반대로 특별한 의미 없이 남겨 둔 공간에 사람들이 모이기도 한다.
건축가는 공간을 설계할 수 있지만 사람을 설계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건축은 사람의 행동을 어디까지 만들 수 있을까?
아마도 해답은 통제가 아니라 유도에 있을 것이다.
사람의 행동을 강제로 결정하는 계획은 때로 피로감을 만들고 공간의 생명력을 잃게 한다. 반면 좋은 계획과 섬세하게 디자인된 공간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신호를 보낸다.
그늘이 있는 곳으로 걷게 하고,
시야가 열리는 곳에 머물게 하며,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만나게 만든다.
좋은 공동주택은 사람을 통제하는 공간이 아니다.
사람들이 걷고,
머물고,
만나고,
관계를 만들어 갈 가능성을 열어두는 공간이다.
생활가로를 계획할 때도 마찬가지다.
생활가로는 연도형 주거군과 커뮤니티 시설, 근린생활시설을 적절히 배치하여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유입과 관계 형성을 유도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학교 가는 길은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진다.
학생들이 이용하는 보행로인 만큼 안전이 최우선이지만, 그 안에서도 재미와 볼거리, 그리고 다양한 활동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중심보행로는 더욱 섬세해야 한다.
다양한 연령과 목적을 가진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공간계획과 조경계획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움직임과 머무름을 유도하기 위한 장치가 된다.
결국 건축가는 길을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가능성을 설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스케치를 다시 보며 생각한다.
주거와 자연, 그리고 커뮤니티 시설은 계획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이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동까지 설계할 수 있을까?
어쩌면 건축가의 역할은 답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가능성을 만들어 두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가능성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길을 찾는다.
오늘도 나는 같은 질문을 다시 던져 본다.
사람의 행동은 설계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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