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대지를 하나의 흐름으로 잇다 | Project 004
대전 석촌 주거환경개선사업 현상설계 당선작, 2004
새로운 공동주택은 기존 도시에 어떻게 들어가야 할까.
2004년 대전 석촌 주거환경개선사업 현상설계를 시작하며 가장 먼저 생각했던 질문이다.
대지는 하나로 정리된 땅이 아니었다. 기존 석촌마을아파트를 중심으로 세 개의 대지가 도로에 의해 나뉘어 있었다. 각각의 대지에 필요한 주동을 배치하는 것만으로는 하나의 단지가 될 수 없었다.
주동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보다 먼저, 서로 떨어진 세 개의 대지를 어떻게 하나의 단지처럼 연결하고 작동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했다.
세 개로 나뉜 대지와 주변 도시의 관계를 함께 보여주는 현상설계 조감도.
기존 도시에서 시작하다
계획의 시작은 기존 도시와의 조화였다.
여기서 말하는 조화는 주변 건물과 비슷한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도시가 오랫동안 형성해 온 가로의 방향과 기존 아파트의 배치축, 주변 저층주거지의 높이와 스케일을 읽고, 새로운 계획이 그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일이었다.
기존 도시에는 이미 서로 다른 방향의 축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새로운 계획은 또 하나의 강한 축을 대지 위에 덧씌우기보다 도시의 가로축과 기존 석촌마을아파트의 배치축을 받아들이고 연장했다.
기존 단지의 주동 사이에 형성된 시각적 통로도 새로운 배치 안에서 이어지도록 했다. 새로 들어서는 건물이 기존 단지의 앞을 막지 않도록 저층형과 고층형 주동을 나누어 배치하고, 전면 저층주거군과 기존 공동주택 사이에서는 높이가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스카이라인을 만들고자 했다.
기존 저층주거군과 도시의 가로축을 읽고 배치의 방향을 설정한 개념도.
새로운 계획이 기존 도시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도시의 질서를 이어받기를 바랐다.
기존 석촌마을의 배치축과 시각적 통로를 새로운 계획 안으로 연장한 개념도.
세 개의 대지를 하나의 흐름으로
세 개로 분절된 대지는 하나의 고리로 연결했다.
이 고리는 단순한 형태적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서로 떨어져 있는 대지의 보행로와 광장, 조경공간과 커뮤니티 시설을 잇는 공간의 흐름이었다.
분절된 세 개의 대지는 하나의 고리로 관계를 맺는다. 고리를 따라 이어지는 공간의 흐름 속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사람과 문화가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당시 계획안에서는 이 생각을 FLOW, LAYER, AXIS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정리했다.
FLOW는 도로와 기존 단지에 의해 끊어진 보행의 흐름을 다시 잇는 개념이었다. 사람들은 하나의 대지 안에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생활가로와 광장, 커뮤니티 공간을 따라 세 개의 대지를 연속적으로 경험한다.
LAYER는 기존 도시질서 위에 새로운 생활의 켜를 더하는 것이었다. 기존 도시를 새로운 계획으로 덮는 것이 아니라, 보행과 녹지, 수공간과 커뮤니티의 흐름을 하나씩 덧입혀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자 했다.
AXIS는 기존 석촌마을의 배치축과 도시의 가로축을 새로운 계획 안으로 연장하는 것이었다. 기존 단지의 질서와 시각적 통로를 이어받아 새로운 주동이 도시축에 순응하도록 했다.
축은 기존 도시의 질서를 잇고, 고리는 세 개의 대지를 연결하며, 흐름은 그 안에 삶을 담는다.
세 개의 대지를 보행 흐름과 생활가로, 녹지와 수공간으로 연결한 현상설계 배치도.
가로와 관계를 맺는 공동주택
주동계획은 대지 안에 독립적으로 놓이지 않고 가로와 관계를 맺도록 계획했다.
가로를 따라 저층부가 연속되는 연도형 주동을 배치해 생활가로축을 형성하고, 높은 주거동은 그 뒤에서 도시의 밀도를 담당하도록 했다.
가로와 연계된 연도형 주동과 저층·고층 주동의 조합을 보여주는 개념도.
고층 주동만 반복되는 단지에서는 건물 사이의 공간이 용도 없이 남겨진 외부공간이 되기 쉽다. 이 계획에서는 저층부가 길의 경계를 만들고, 그 안에 사람의 움직임과 생활이 머물 수 있도록 했다.
주거동의 출입구와 보행로, 광장과 커뮤니티 시설은 생활가로를 따라 이어진다. 길은 단순히 이동하는 통로가 아니라 사람들이 만나고 머물며 일상의 장면을 만드는 장소가 된다.
야경 투시도에서 왼쪽에 보이는 건물들은 기존 석촌마을의 건물이고, 오른쪽이 새롭게 계획한 주거동이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건물의 입면만이 아니다. 기존 건물과 새로운 건축 사이에 형성된 거리, 그리고 그 거리를 채우는 사람들의 움직임이다.
새로운 건축은 기존 도시와 분리된 상태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 도시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형태보다 오래 남는 것
현상설계 당선 이후 실제 사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주동의 입면은 많이 변경되었다.
2004년의 조감도와 현재의 건물을 비교하면 외관의 표정은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도시의 가로축과 기존 단지의 배치축을 이어받은 주동 배치, 저층과 고층이 함께 만드는 스카이라인, 세 개의 대지를 연결하는 공간의 큰 흐름은 준공된 단지에도 남아 있다.
지금은 그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당시 투시도에 그려 넣었던 생활의 장면이 그대로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생활 방식도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건물 사이의 길을 걷고, 열린 공간을 지나며, 이웃과 마주치는 일상의 관계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오래된 현상설계 자료를 다시 보며 생각한다.
건축의 입면과 재료는 현실의 여러 조건 속에서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대지를 바라보는 방식과 건물 사이의 관계, 사람의 움직임을 담는 공간의 질서는 더 오래 남는다.
이 프로젝트의 의미는 세 개의 대지를 연결하고 주변 맥락에 순응한 배치에만 있지 않다.
우리가 잇고자 했던 것은 세 개의 대지만이 아니었다.
사람이 걷고 만나며 관계를 맺는 하나의 흐름이었다.
프로젝트 기록
CLIENT | 대한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
SCALE | 지하 1층 · 지상 25층
DESIGN / IMAGE SOURCE | 원양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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