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CEPT, 설명이 아닌 설계의 언어 | Architecture Essay 006

Architecture Essay 006은 건축 컨셉이 대지와 도시, 생활과 기능에서 나온 생각을 하나의 방향으로 잇고 설계를 이끄는 디자인 언어가 되는 과정을 기록한다.
건축 컨셉에 관한 파란색 손글씨 노트 위에 CONCEPT와 NOT AN EXPLANATION BUT A DESIGN LANGUAGE 문구를 배치한 Architecture Essay 006 커버

설계를 진행하다 보면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그중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이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컨셉은 무엇입니까?”

복잡한 설계 내용을 하나의 단어나 문장으로 정리하고 다른 사람에게 명확하게 전달하는 일은 필요하다. 그것도 건축가에게 필요한 능력이다.

그러나 하나의 단어가 선택되었다고 해서 곧 컨셉이 되는 것은 아니다.

컨셉은 그냥 나오지 않는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나의 방향으로

대지를 분석할 때 생기는 생각이 있다. 도시의 맥락을 읽으려 할 때 생기는 생각이 있고, 필요한 기능을 검토할 때의 생각도 있다. 평면을 스케치할 때 떠오르는 생각도 다르다.

이 생각들은 모두 하나의 설계를 향하지만 서로 다른 자리에서 시작한다.

대지에서 발견한 가능성과 도시가 요구하는 관계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생활방식의 변화에 따라 필요한 공간과 건축가가 그리고 있는 형태가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만나는 것도 아니다. 평면에서 가능했던 생각이 단면에서는 다른 문제를 만들고, 형태의 선택이 구조와 재료에 새로운 조건을 요구하기도 한다.

컨셉은 이렇게 서로 다른 생각들을 하나의 건축으로 이어가기 위해 필요하다.

모든 생각을 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대지에 대한 생각은 대지에 남고, 도시를 향한 생각은 도시와 관계하며, 평면에서 시작된 생각은 실제 공간과 생활을 만든다.

각각의 생각이 자신의 역할을 하면서도 하나의 방향을 향하게 하는 것. 그것이 컨셉이 해야 할 일이다.

지우는 데에는 항상 ‘왜?’가 있다

설계를 시작할 때는 가능한 모든 것을 가정한다.

건물의 배치, 동선의 위계, 공간의 계획, 사람의 행태, 평면의 조닝까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다.

가능성을 미리 하나로 한정하지 않는다.

여러 방향을 생각하고 그 가능성을 하나씩 검토한다. 그리고 하나씩 지워간다.

지우는 데에는 항상 ‘왜?’가 있다.

왜 이 배치는 아닌가. 왜 이 동선은 남아야 하는가. 왜 이 공간은 더 넓어야 하고, 왜 이 부분은 비워야 하는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보다 무엇을 지울 것인지 결정하는 일이 더 어려울 때도 있다.

하나를 지우려면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질문하고 지워가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분명하지 않았던 생각들이 조금씩 같은 방향을 갖기 시작한다. 서로 다른 가능성 사이에 관계가 생기고 무엇이 중요한지 드러난다.

컨셉은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주변 맥락에서 아이디어와 실행 항목으로 이어지고 대안 검토와 선택을 거쳐 계획이 완성되는 과정을 화살표로 정리한 건축가의 손글씨 노트

가능성을 검토하고 선택하며 컨셉을 발전시키는 과정에 관한 건축가의 기록.

설계와 함께 만들어진 기준

컨셉은 처음부터 완성된 문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설계보다 먼저 정해놓고 모든 것을 끌고 가는 구호도 아니다. 대지와 도시를 읽고, 평면과 단면을 그리고 지우며, 수많은 가능성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컨셉은 조금씩 분명해진다.

그런데 설계와 함께 만들어진 컨셉이 어느 순간부터는 다시 설계의 강력한 기준이 된다.

모순처럼 보인다.

설계 과정에서 만들어졌는데 이제는 설계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한다.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였던 생각이 이후의 선택을 판단하는 큰 전제가 된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컨셉의 역할이다.

컨셉은 설계의 길잡이가 된다. 생각을 한곳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어디까지 확장해 나갈 것인지 방향을 제시한다.

때로 컨셉은 설계의 이유가 되고, 설계가 끝까지 품어야 할 물음이 되기도 한다.

왜 이 설계여야 하는가.

그 물음이 설계의 WHY가 되고,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REASONING이 된다.

큰 전제의 컨셉은 전략과 닮았다.

전략은 전체가 향할 방향을 세운다. 배치와 평면, 단면과 형태, 구조와 재료를 결정하는 일은 그 방향을 실현하기 위한 전술이 된다.

같은 생각은 다른 옷을 입는다

전술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같은 생각도 다른 옷을 입을 수 있다. 형태가 달라지고 표현하는 단어가 바뀌더라도 그 안에 담긴 중심 생각은 이어질 수 있다.

비슷한 뜻을 가진 여러 단어가 존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하나의 생각을 하나의 단어만으로 완전히 담을 수는 없다. 흐름과 연결, 관계와 소통은 서로 다른 말이지만 같은 방향의 생각을 다른 모습으로 드러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컨셉은 하나의 뜻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대지와 도시, 생활과 기능, 평면과 단면에서 생겨나는 여러 의미를 함께 품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설계가 진행되면서 생각이 더 넓어질 수 있다.

반대로 처음 선택한 단어나 형태를 컨셉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컨셉은 설계를 한정하기 시작한다.

‘흐름’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고 해서 모든 선이 흘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연결’을 말한다고 해서 모든 공간을 물리적으로 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단어를 지키기 위해 설계하는 순간, 생각은 더 이상 확장되지 않는다.

이것은 컨셉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컨셉의 진정한 의미를 하나의 단어나 눈에 보이는 형태로만 이해했기 때문이다.

컨셉에 정답과 오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은 대지와 같은 조건을 보더라도 건축가마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 무엇을 먼저 발견하고 어떤 가능성을 중요하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컨셉과 건축이 나올 수 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생각이 다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선택한 단어가 얼마나 새롭고 특별한가가 아니다. 그 생각이 대지와 도시, 생활과 공간을 지나면서 얼마나 일관된 방향을 만들어내는가에 있다.

건축물을 조각한다는 것

건축가는 그 방향을 따라 건축물을 조각한다.

여기서 조각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형태만을 다듬는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이 어디에서 들어오고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동선을 계획한다. 그 공간에서 이루어질 생활방식을 분석하고, 무엇을 담아야 하며 무엇을 비워야 하는지 명확히 한다.

공간의 크기와 높이를 정하고 빛과 재료가 만나는 방식을 살핀다. 서로 다른 공간들이 어떤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건축이 될 것인지 끊임없이 그리고 지운다.

그 과정에서 건축가의 철학도 건축물 안에 담긴다.

건축에 철학이 생긴다는 것은 건축가의 생각을 사용자에게 강요한다는 뜻이 아니다.

철학은 명령이 아니라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건축은 사람에게 정해진 방식으로 살라고 요구할 수 없다. 다만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공간과 생활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다. 사용자는 그 안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가지만, 그 다양한 생활을 받아들이는 건축에는 분명한 방향이 있어야 한다.

컨셉은 그 방향이 설계 전체에서 흩어지지 않게 한다.

컨셉이 디자인 언어가 될 때

평면과 단면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공간에서 같은 방향이 느껴져야 한다. 동선과 공간, 구조와 재료가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도 하나의 건축을 말해야 한다.

그때 컨셉은 디자인 언어가 된다.

컨셉이 디자인 언어가 되면 더 이상 긴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건축가가 앞에 서서 컨셉을 말하지 않아도 설계 자체에서 그 방향이 보인다. 사람들은 컨셉이라는 단어를 알지 못해도 공간을 지나며 그 생각을 경험한다.

모든 공간에 컨셉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컨셉은 말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설계와 함께 만들어지고, 다시 설계를 이끌며, 마침내 공간 속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설계 자체에서 그 방향이 보일 때, 컨셉은 비로소 하나의 건축이 된다.

Architect Park Nohhyun. Recording the journey from thought to space. Architect 박노현. 생각이 공간이 되어가는 과정을 기록합니다.